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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재활용 신화 속 불편한 진실

2020-03-20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다고 한 번 생각해봅시다. 벨트가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팔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벨트가 빨라지면 걸음도 빨라지고, 벨트가 느려지면 걸음도 느려지겠죠.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벨트가 내 속도로 따라잡기 불가능할 만큼 빨라진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나거나, 긴급 멈춤 스위치를 누르게 될 겁니다. 이번엔 일회용 플라스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까요? 여러분은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졸린 눈을 비비며 분리수거장에 나갑니다. 각종 플라스틱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내놓고, 음식을 담아 오염된 플라스틱은 물에 헹궈 쌓아둡니다. 장을 보러 마트에 갈 땐 일부러 에코백을 챙기고, 카페에선 자연스레 점원에게 텀블러를 건넵니다.




버려진 플라스틱 페트병들. (사진=그린피스 제공)



그런데 왜, 여전히 집 안에는 플라스틱 포장재가 넘치고 길거리엔 버려진 일회용 컵이 나뒹구는 걸까요? 왜 하루가 멀다 하고 해양생물과 바닷새의 뱃속에서는 플라스틱이 발견되는 걸까요? 국제환경 NGO '리싱크플라스틱'의 델핀 아베어스(Delphin alvares)는 이에 대해 "본질적으로 소비자가 가지고 오는 변화는 생산자의 변화가 담보되지 않고는 큰 효과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소비자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겁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아무리 천천히 걷고 싶어도, 벨트가 빠르게 움직이면 그에 맞춰 달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요. 그는 "진정 '제로 웨이스트' 삶을 살고 싶은 의지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제공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지가 별 소용이 없다"고도 강조합니다.


한국에서 플라스틱 문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덜 사용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쓰고, 일회용 빨대를 쓰지 않거나 종이빨대를 사용하도록 '권고'되고 있죠. 대형마트 등에서는 1회용 비닐봉투 대신 종량제 봉투를 쓰거나, 보증금이 매겨진 재사용 봉투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제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을 보며 질문을 한 번 던져볼 타이밍입니다. 이렇게 많은 일회용품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생산자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플라스틱 제품들에 책임을 지고 있을까요?



생산자 책임 묻는 '생산자책임' 제도, 실효성은 '글쎄'


정부가 플라스틱 제품에 대해 생산자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는 대표적인 정책은 '생산자책임재활용(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EPR) 제도 입니다. 이는 제품이나 포장재 폐기물에 대해 생산자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생산자는 제품의 설계, 생산단계에서 디자인·소재·포장 개선 등을 통해 쓰레기 발생 자체를 원천적으로 줄일 수 있는 가장 유리하고 확실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품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책임도 강화하는 거죠.


자원재활용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EPR은 제품이나 포장재 폐기물에 대해 생산자가 일정 부분 재활용 의무를 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매년 초 환경부에서 품목에 따라 재활용 의무율을 고시하고요, 기업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제품 중 정해진 의무율 만큼은 반드시 재활용 해야 하는 겁니다. 2019년의 경우 의무율은 알루미늄캔 79.7%, 유리병 72%, 페트병 80.1%, 단일재질 용기류 80.8% 수준입니다. 




기업들이 이 재활용 의무를 이행했음을 정부에 증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판매한 제품과 포장재에 대하여 직접 또는 위탁하여 회수하고 재활용 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 이는 쉽지 않죠. 한 번 생산한 제품이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생산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판매한 제품과 포장재의 재활용 의무율 만큼 공제조합에 분담금을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EPR 제도 개념도 (사진=포장재재활용사업공제조합 홈페이지)


EPR은 포장·재활용사업공제조합과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가 주체가 되어 진행됩니다. 생산자들이 개별적으로 재활용에 신경쓰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모여서 조합을 만든 건데요. 생산자들은 이 포장·재활용사업공제조합에 분담금을 지급합니다. 순환자원유통센터는 재활용 업체들과 연결, 재활용 업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기업들이 낸 분담금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런 EPR 제도가 소기의 목적처럼 플라스틱 제품 생산, 소비, 폐기 과정에서 생산자의 책임을 강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린피스의 김미경 플라스틱 캠페인 팀장은 이와 관련해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EPR에 포함되어 있는 제품은 전체 플라스틱 생산품을 커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짚었습니다. 가령 환경부가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있는 일회용 음료 컵이나 빨대같은 경우는 포장재가 아니기 때문에 EPR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제품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내도, 지켜야 할 재활용 의무율 같은 것 자체가 없는 거죠. 또 소비 패턴의 변화로 재활용이 어려운 복합재질, 색상, 디자인을 사용한 포장재도 증가했습니다. 이런 플라스틱들은 소비자들이 분리수거를 하고 생산자가 분담금을 지불하더라도 오염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각지대'입니다.




  

  

포장재 배출 업체에서 걷은 분담금과 재활용 업체에 지원하는 비용의 차액이 계속 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재활용 분담금과 재활용 지원금 총 차액은 2014년 이후 꾸준히 약 300억원 가량 발생했습니다. 특히 폐비닐류의 경우 차액이 2014년 46억원에서 3년만에 126억원으로 3배 가량 뛰었습니다. 100억이 훌쩍 넘는 돈이 재활용 업체에 지급되지 않고, 공제협회 운영비 등의 별도 용처에 사용된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기업이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를 대량 생산하면서 재활용 명목으로 지불한 금액이 정작 재활용에 제대로 쓰이지 않은 거죠. 이런 분담금이 생산자의 책임을 얼마나 강화했는지는, 여전히 판단이 어렵습니다.


생산자 책임을 '재활용' 차원에서만 강조하고 있는 것도 한계로 지적됩니다. 김미경 팀장은 "폐기물을 관리하는 데도 우선순위가 있다"고 강조했는데요.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스틱 제품의 생산 자체를 줄이는 것(REDUCE), 두 번째가 다시 사용하는(REUSE) 것, 그리고 마지막이 재활용(RECYCLE)입니다. 그러나 현재 정부가 생산자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책임은 마지막 단계인 재활용 수준에 그칩니다. 김미경 팀장은 "재활용만 잘 해서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접근법이라 우려하고 있다"며 "물건이 만들어지고, 소비하고, 폐기되어 재활용되는 전체 싸이클에서 제조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U가 새롭게 추진하는 플라스틱 전략에 대한 안내문. 

수명이 긴 재질로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할 것과, 재사용&재활용 하기 쉽게 만들 것, 수거가 용이하도록 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모든 플라스틱 포장재를 재사용 가능하거나 재활용 가능한 재질로 만들게끔 강제할 예정이다.




유럽연합의 경우 생산자들이 제품 설계 단계부터 환경 친화적 디자인을 택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논의 중에 있고, 생산자가 내야 하는 분담금 역시 재활용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물병의 본체와 뚜껑을 일체형으로 만드는 에코디자인 규제가 근시일 내에 법제화 될 예정입니다. 플라스틱 병의 뚜껑은 유럽 전역의 해안가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쓰레기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 유럽연합의 EPR 제도는 생산자에게 플라스틱 폐기물의 수집, 운송, 처리 과정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제해 왔는데요, 올해 초 EPR 제도가 강화되며 이제부터는 플라스틱 쓰레기 청소, 인식 제고 캠페인을 위한 비용도 생산자가 부담해야 합니다.


유럽의 EPR 제도가 강화되며 포장재 뿐 아니라 소량의 플라스틱이 포함된 담배 필터, 물티슈도 EPR 관리 대상 품목으로 들어온 것도 주목할 점입니다. 물티슈와 담배 필터를 제조하는 기업들은 앞으로 물티슈와 담배 제품의 포장에 '해당 제품에는 플라스틱이 포함되어 있고, 제품을 쓰레기통이 아닌 다른 곳에 버릴 경우 환경에 위해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을 반드시 표기해야 합니다. 소비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제품이 플라스틱으로 이뤄졌으며, 오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게끔 하는 거죠.




EU집행위원회 플라스틱 정책 담당자 워너 보스만(Werner Bosman)이 브뤼셀 집행위원회 사무실에서 노컷뉴스와 인터뷰 하고 있다.



노컷뉴스 취재진이 브뤼셀에서 만난 EU 집행위원회 플라스틱 정책 담당자 워너 보스만(werner bosman)은 EU의 플라스틱 규제 정책에 대해 "EU는 생산자를 규제하는 것이 플라스틱 문제에서 상당히 균형 잡힌 접근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은 제품을 만드는 첫 단계에서부터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인식 제고의 단계까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재활용 맹신, 진짜 책임 가리고 '죄책감 지우개' 역할



그린피스 EU사무소의 케빈 스테어즈(Kevin Stairs) 가 브뤼셀 그린피스 사무실에서 노컷뉴스 취재진과 인터뷰 하고 있다.


환경 전문가들은 "이제 '재활용 신화'를 버릴 때가 됐다"고 말합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화학정책 자문위원인 그린피스의 케빈 스테어즈(Kevin Staris)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플라스틱 이슈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정부와 기업이 재활용에 너무 몰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자칫 생산자의 '진짜 책임'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친환경적으로 제품을 디자인 하고, 일회용품 생산량 자체를 줄이고, 재사용 할 수 있는 제품 생산을 촉구한 다음에야 재활용이 해결책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겁니다. 스테어즈는 "화장실에서 물이 넘쳐 바닥이 온통 물바다가 됐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닥을 닦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이라며 "플라스틱 문제에서도 같은 공식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출처=OECD Statistics)



사실 한국은 분리수거와 재활용을 세계에서 가장 잘 하는 나라에 속합니다. OECD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쓰레기 대비 재활용되거나 수거된 쓰레기 비율은 59%로, 독일을 이어 전세계 2위 수준이었습니다. 지난해 4월 발생했던 '쓰레기 대란' 훨씬 이전부터 재활용과 분리수거를 어느 나라보다도 충실히 해왔던 겁니다.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는 분리배출 날짜와 규칙이 정해져 있고, 한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분리수거를 잘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니까요.


그러나 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이 어렵게 만들어진 제품은 분리수거장을 거치더라도 종국에는 소각되거나 매립되고, 해외에 불법 수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쌓여 '쓰레기 대란'이 벌어졌던 것이고요. 저널리스트 수전 프라인켈은 저서 <플라스틱 사회>에서 "페트병이 재활용된다는 믿음이 '죄책감 지우개'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재활용 촉구'로 바닥에 넘친 물을 닦고만 있는 상황은 아닌지, 그로 인해 소비자는 그 심각성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매순간 죄책감을 지우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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